문자통역 (1학년 2학기)

Lesson 05. Language of Media

개인은 언제나 거대한 세계와 접촉한다.
그 세계는 개인에게 말을 걸어온다.
세계가 말을 걸어오는 방식은 매우 다양하다.
집에서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말을 걸어온다.
학교에서는 선생님의 모습으로 말을 걸어온다.
회사에서는 사장님의 모습으로 말을 걸어온다.
병원에서는 의사의 모습으로 말을 걸어온다.
이러한 세계 중에서 내가 유독 신뢰하는 매체가 있다.
이것들은 신문과 뉴스다.
두 사람이 논쟁을 하고 있을 때,
한 사람이 논쟁을 이기게 해주는 한 마디의 말은
"야, 이거 어제 뉴스에 나왔어!”이다.
오늘 날의 미디어는 진리를 판별하는 기준이 된다.
우리는 미디어가 객관적으로 진실을 말한다고 믿는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뉴스나 신문이 거짓을 보도하고 있다고? 그건 있을 수 없어!”
우리가 미디어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의미론과 화용론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의미론은 말의 의미와 내용을 탐구하고,
화용론은 말의 주변 상황을 탐구하는 것이다.
예로, 매우 더운 여름 어느 날,
농부인 아버지와 공대생인 아들이 농장에서 일을 하고 있다.
아버지는 아들에서 갑자기 “물?”이라고 외친다.
그러자 아들은 “물은 액체이고 산소와 수소의 화학적 결합물입니다.” 라고 대답한다.
이것은 틀린 대답은 아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인가?
아들은 아버지가 말하는 물의 의미를 파악했어야 했다.
만약 그 아들이 화용론을 이해했다면
그는 시원한 물을 가지러 뛰어 갔을 것이다.
이처럼 화용론은 그 말의 내적인 의미가 아니라 그 말이 사용되는 여러 가지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다.
미디어는 의미론적 측면에서 거짓을 말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정말로 문제가 되는 것은
미디어가 화용론적 관점에서 객관적인 보도를 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즉, 권력자의 관점에서 주관적으로 말한다는 것이다.
첫째, 미디어가 정부의 관점에서 정보를 대중에게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미디어가 기업의 관점에서 정보를 대중에게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대중에게 있다.
대중은 정직하고 순박해서,
미디어가 우리에게 주는 정보만이 사실이라고 믿고 있다.
그들이 자신을 속일 것이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
심지어 미디어를 의심하는 것은 반사회적인 행위로 취급된다.
의심 없는 대중은 미디어의 말을 앵무새처럼 따라 하고,
그들이 비웃는 대상을 같이 비웃고,
그들이 칭찬하는 대상을 같이 칭찬한다.
삼성전자 제품이 세계 점유율 1위가 된 것은 당신에게 절대로 중요한 일이 아니다.
미디어가 재벌기업에 열광한다고 해서,
여러분이 앵무새처럼 이 기업에 열광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여러분의 친구 중에 전교 1등이 있다고 자랑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